공작의 서핑 보드
서핑 보드
목재
20 세기 초
카하나 모쿠 공작 소유
카하나 모쿠 공작은 스포츠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서퍼라 할 수 있습니다. 공작은 1890년 와이키키의 버니스 파우아히 주교의 집인 할레아칼라에서 태어나 다이아몬드 헤드 근처 해변에서 대가족과 함께 성장하였으며 전문 뱃사공이 되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서퍼, 올림픽 참자가, 영화 배우 및 유명 인사로 서핑뿐만 아니라, 근심 걱정 없는 비치보이 생활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공작이 젊었던 초기 1900 년대에 서핑이라는 스포츠는 하와이에서 거의 잊혀졌습니다. 1800 년대 전반에 걸쳐 기독교 선교사들이 서핑은 부도덕하고 게으름의 표시라고 여겨 이 취미를 말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는 여전히 헤에 날루 아나라는 예술 -글자 그대로 파도 보드 슬라이딩-을 연습했습니다.
공작이 자라면서 탔던 보드는 오늘날의 가볍고 고성능 서프보드와는 매우 달랐습니다. 그 당시 보드는 목재였고 아래쪽 지느러미 혹은 버팀대도 부족하였으며 때로는 100 파운드 이상 나가는 무게에 길이가 최대 14 피트나 되었습니다.
이 보드는 무게가 75 파운드인데 서퍼이자 서프보드 혁신가인 톰 블래이크가 공작에게 주었습니다.
캘리포니아에 서핑을 소개한 최초 하와이 사람은 카하나 모쿠 공작이 아니었습니다. 그 영예는 젊은 알리이 혹은 족장 3명에게 돌아가는데 1885년 산타 크루즈 근처에서 그 예술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1912년 코로나 델 마 및 산타 모니카에서 보여준 공작의 시범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그 후 1915년에 공작이 서핑을 소개하였는데 현지에서 토종 호주 설탕 소나무를 보드로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공작의 운동 기량은 서핑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1911년에는 그가 약 5초 차이로 백야드 단거리 기록을 깨 수영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1912 년에는 그가 미국 올림픽팀의 일원으로 스톡홀름 게임에 참가하여 세계 기록을 깨고 금은메달을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뉴욕 타임즈는 공작이 한 때 반 마일 이하의 모든 자유형 기록을 보유하였다고 언급하였습니다.
1924 년 파리 올림픽에 공작이 이 서핑 보드를 가지고 가서수영부문에서 은메달을 획득하였습니다.